[한경에세이] 버려서 얻는 것
■ 이승신 한국소비자보호원 원장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이라는 영화였는데, 그때의 잔잔한 감동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롭다. 배불뚝이 잭 니콜슨과 눈가에 굵은 주름이 파인 다이앤 키튼. 어찌 이들에게 애잔한 멜로를 기대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두 배우는 황혼기의 사랑도 파릇파릇한 청춘 못지 않게 찬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그 영화를 보면서 다이앤 키튼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50대의 여성이 저토록 매력적일 수 있을지,부러움이 얽힌 감정 속에서 영화를 본 것 같다. 배우가 뿜어내는 매력이 인상적인 영화였지만 무엇보다 두 남녀가 벌이는 심리전과 허물어짐은 재미를 떠나 긴 여운을 남긴다.
명예와 부(富) 등 모든 것이 갖춰진 조건 속에서 버릴 게 없는 이들에게 그러한 조건은 단단한 외피(外皮)가 되어 오히려 사랑의 장애물로 와 닿는 듯했다. 단단한 외피는 부와 명예일 수 있고,자존심일 수 있고,이기심일 수도 있다. 그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면 진심어린 사랑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해리와 에리카는 현명한 선택을 한다.
영화처럼 굳이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때로 우리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으려 하다 더 큰것을 잃을 때가 있다. 내것을 허물기 싫어서,손해볼까봐,변화가 두려워서,인정하기 싫어서,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있다. 가까운 친구끼리,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간에,사업자와 소비자의 분쟁에서,기업주와 근로자의 격렬한 쟁의(爭議)에서 우리는 얼마나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왔는가.
필자가 몸담고 있는 소비자보호원에선 지난 한 해 약 30만건의 소비자 상담을 접수했다. 이 가운데 합의권고가 필요한 건은 피해구제 건으로 분류해 담당직원이 30일 이내에 처리하도록 돼 있다.
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소비자는 사업자와 격한 감정일 수밖에 없어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팽팽하게 대립하던 사업자와 소비자가 원만한 합의에 이를 때는 피해보상을 떠나 더 큰 것을 얻는다. 소비자는 사업자의 잠재 고객으로 남고,사업자는 소비자의 불만을통해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가을,2년 전 보았던 영화를 새삼 음미해 본다. 해리와 에리카는 하나를 버리고 둘을 얻은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출처 : 한국경제신문, 2006.11.10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