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에서 유출된 방사선물질은 인근국가인 우리나라에도 심각하게 우려할만한 대상이다. 지난 3월 일본 도호쿠 지방의 대지진은 당연 엄청난 천재이자 대재앙임에는 틀림없지만 극복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원자력발전소의 방사선유출은 이 시대의 기술 수준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인재임에 틀림없다.
지난 7월 일본 출장에서 만난 동경의 일본시민들은 예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지만 ‘방사선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는 세미나에서 만난 일본시민들이나 의학 및 화학 전문가들은 한결 같이 무력감을 호소하였다. 시민단체의 방사선물질 세미나에 참석한 백여명의 일본시민들이 대부분 고령자라는 점이 필자에게는 매우 안타깝게 느껴졌다. 동석한 20대의 통역자의 전언에 따르면 ‘일본 젊은이들은 방산선 문제를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고 해결방안은 없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력감으로 인해 위험회피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방사선물질을 포함한 화학물질에 대한 노출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생각할 때 단기적인 피폭이나 질병발생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화학물질에 대해 저용량이지만 장기적으로 노출될 경우 각종 질병이나 유전적 결함 등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사선물질이외에도 저용량이지만 장기적으로 노출될 경우 여러 질병이나 유전적 결함을 유발할 수 있는 화학물질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내분비계장애물질(환경호르몬)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전세계적으로 내분비계장애물질(환경호르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았다. 그 당시 이 화학물질들은 생물체에서 나오는 호르몬과 화학구조가 비슷해 생물체가 천연 호르몬으로 착각하고 이들과 결합해서 비정상적인 생리작용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환경호르몬으로 이름이 붙여졌었다. 지금은 이 화학물질들이 주로 내분비계를 교란하고 장애를 일으키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내분비계장애물질(endocrine disrupters)로 부르고 있다.
내분비계장애물질의 예를 보면 다이옥신류(PCBs), 농약/살충제류(DDT 등), 산업용화학물질(비스페놀 A, 프탈레이트, DEHP 등), 식품첨가물(항산화제 등), 유기중금속류(카드뮴, 납, 수은 등) 등으로 소비자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소비생활제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가령 다이옥신은 발암성분으로 알려져 있고 쓰레기 소각과정에서 많이 발생하지만 플라스틱을 전자레인지에 가열할 때, 그리고 다이옥신성분이 있는 제조체가 뿌려진 식품을 먹고 자란 동물들의 고기(동물성 지방)를 통해 인체에 들어올 수 있다. 비스페놀 A 역시 남성의 정자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호르몬을 잘 알려져 있는데 장난감이나 젖병, 식품용기에 널리 사용된다. 프탈레이트는 유산, 돌연변이와 관련있는 환경호르몬으로 알려져 있는데 벽지, 비닐바닥, 샤워커튼, 장난감 등에 사용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화학물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화학물질의 인체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영향에 대해서 무감해지기 쉽다. 또 현대소비사회에서 쓰레기는 범람하고,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묘안을 찾기도 어려우며, 편리성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은 플라스틱 용기나 실내내장재, 일회용품 등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에 대해 유럽, 미국, 일본이나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소비제품이나 환경에 만연돈 화학물질에 대한 평가 및 규제를 통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차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더욱 효과적인 것은 소비자의 내분비계장애물질에 대한 신중한 행동임에 틀림없다. 우선 소비자들은 내분비계장애물질의 장기적인 영향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소비자가 내분비계장애물질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내분비계장애물질이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무시하거나 지나치게 두려워할 것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현재 세대나 후속 세대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각종 화학물질을 통해 편리함을 누린 만큼 보이지 않는 극소량의 방사선, 내분비계장애물질이 향후 후속세대에 미칠 영향에 대해 인식하고 줄일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책임이 있다. 미래에 만약 이러한 화학물질의 피해가 현실로 나타날 경우 우리의 후속세대가 이에 대해 무력하여 머리 아프니까 생각하지 말자라는 식으로 회피해버리는 슬픈 일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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