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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비자보호 선진국인가
등록일
2009-06-30
조회수
5447
소비자칼럼(371)
우리는 소비자보호 선진국인가
중남미 국가 중에 엘살바도르란 나라가 있다. 멕시코 밑에 붙어있는 고만 고만한 나라들 중 하나로, 좁은 국토에 인구 700만,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불이 채 안 되는 전형적인 후진국이다. 내게 있어 이 엘살바도르에 대한 기억은 좀 엉뚱하다. 언젠가 민방위교육을 갔더니 정신교육강사가 각국의 음주운전 처벌기준을 소개하면서 엘살바도르의 경우는 무조건 총살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아무리 음주운전이 아무리 나쁜 범죄라 하더라도 총살을 시킨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의아해하면서도 자신에 찬 강사의 설명에 세상에는 참 이상한 나라도 있구나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그렇게 난 엘살바도르를 별 볼일 없는데다 이상하기까지 한 나라로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우연한 기회에 그런 엘살바도르를 가볼 기회가 있었다. 원래 방문목적은 엘살바도르의 소비자정책에 대한 자문이었지만, 솔직히 난 그 보다는 정말 음주운전하면 총살을 시키는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꼬박 20시간이 넘는 여행 끝에 수도 산살바도르에 도착한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갈 생각으로 프론트에 식당추천을 부탁하자 직원이 머뭇거리다가 밤에는 치안이 불안하니 그냥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으란다. 참 속보이는 영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피곤하고 배도 고픈 상태라서 그냥 그렇게 하기로 하고 미디움레어의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한참 후 음식이 나오고 고기를 썰기 시작했는데 고기가 많이 구워져서 내가 주문했던 맛이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역시 후진국이 별수 있겠나, 이런 식으로 영업하는데 음식도 이런 것이 당연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먹기 시작했다. 절반쯤 먹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웨이터를 불러 주문한 것보다 고기가 많이 구워졌다고 얘기했다. 웨이터가 주문내역을 확인하더니 두말하지 않고 스테이크 접시를 들더니 ‘죄송합니다. 다시 고기를 구우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난 상관없다고 했고, 잠시 후 웨이터는 적당히 구워진 새로운 스테이크를 가져왔다. 내 경솔한 선입견이 약간은 겸연쩍었다.
다음날 아침 엘살바도르 정부 공무원들과 시내를 나가보니 전날 호텔 직원이 한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상가나 상점은 물론이고 좀 큰 주택들 앞에는 예외없이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비원들이 있었다. 치안이 워낙 불안하다보니 개인적으로 사병(私兵)들을 고용해서 경비를 서는 것이라고 했다. 불현듯 ‘이정도의 무법천지라면 음주운전하면 총살시킬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엘살바도르에서 일주일은 있어야 하는데, 불안한 치안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 생각 끝에 호텔 헬스클럽에서 운동이나 할 생각으로 운동화를 하나 샀다. 그런데 사면서 신어볼 때는 괜찮던 운동화가 런닝머신을 몇 번 뛰다 보니 크기가 안 맞았던지 발이 조금씩 아파왔다. 신발을 교환했으면 좋겠는데 이미 몇 번을 신어서 뒤꿈치가 약간 닳은 상태였고, 런닝머신의 트랙에서 생긴 검은색 이물질이 묻어 있는 상태라서 도저히 교환해 달라고는 못할 거 같았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교환해 주면 다행이고, 안 해주면 싼 것으로 하나 더 사려고 그 상점에 다시 갔다. 그것도 그 운동화를 그냥 신은 채로.. 점원에게 신발이 좀 작은 것 같다, 뛰니까 발이 아프다, 교환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점원이 운동화를 이리저리 보고는 두말하지 않고 좀 더 큰 거로 바꿔가란다. 순간 부끄러웠다. 우선 살 때 확인하고 샀으면서 몇 번이나 신은 신발을 바꿔달라고 쫓아 간 것도 그렇고, 이런 나라에 와서 주제넘은 우월의식과 함께 소비자행정이 어떻고 정책이 어떻고 떠든 것도 부끄러웠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참이 지나서 백화점 갔다가 세일에 혹해서 유명브랜드의 운동화를 하나 샀다. 신어보니 너무 딱 맞는거 같아서 한치수 큰걸로 달라고 했더니 점원이 처음에는 꼭 끼어도 시간이 지나면 늘어나서 괜찮다고 그냥 가져가란다. 아마 세일기간이다 보니 그 사이즈의 재고가 없었나 보다. 운동을 하겠다고 어렵게 결심하고 그 운동화를 신고 2, 30분을 뛰어보니 신발은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발이 너무 조여서 신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엘살바도르에서의 일을 기억하며 백화점을 찾아 구입경위를 설명하고 자신 있게 교환을 원한다고 말했다. 백화점 직원은 신발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이미 신은 신발을 가져와서 교환해 달라면 어떻게 하냐고... 충격이었다. 신다보면 늘어날 말은 온데 간데 없었다.
물론 엘살바도르의 사례가 옳고 우리의 경우가 틀렸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나라마다 시스템과 기준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한 가지 사례를 가지고 그 나라의 전체적인 소비자보호 수준이나 사업자의 의식을 판단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가 제도나 시스템은 훨씬 잘 갖추고 있는지 몰라도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소비자보호는 오히려 엘살바도르가 한수 위라는 느낌을 받았다. 소비자보호에 있어 강력한 법률이나 좋은 제도를 갖추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고객만족 또는 소비자보호에 대한 의지다. 소비자의 불만을 품질과 서비스 개선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소비자피해가 발생하는 경우 기업 스스로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피해구제 노력이 필요하다. 소비자와 밀착되지 않은 기업은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노력들은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국가 규모에 걸맞게 우리나라가 법률과 제도는 물론이고 실제 시장에서도 엘살바도르의 소비자보다 더 보호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엘살바도르에 머무르는 동안 변호사에게 음주운전 처벌에 대해 물어봤다. 말도 안되는 소리란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자기가 이렇게 음주운전을 하겠냐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