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우리나라 경제는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토록 염원했던 1인당 국민소득 2만불이 달성되고, 대망의 GDP 1조 달러 시대가 우리 바로 눈앞에 와 있다. 증권시장은 종합주가지수가 1,700선을 돌파하여 우리 경제의 미래를 낙관하게 하고, 남북으로 끊어진 철도가 개통되어 동북아 경제의 허브로서 자리매김할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 우리 경제가 이토록 잘 나가고 있는데도 국민들 살림살이는 눈에 띄게 좋아진 것 같지 않다. 내수 부진으로 심화된 불경기 탓이다.
이러한 경기불황에도 작년 한 해 경조사비 지출은 2005년 대비 11.9%가 늘어났다. 소득 증가율 5.1%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일인 이상 가구 기준으로 7조 8,256억원, 가구당 한 해 51만원 정도를 지출했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848조)의 0.9%, 가계소비지출액(111조)의 6.5%에 이르는 금액이다. 2인 이상 도시 근로자 가구의 월평균 경조비는 4만 2,345원으로, IMF 경제 위기 이후 9년 만에 처음으로 4만원 대를 돌파했다. 서민들 입장에서 허리가 휠 지경이다. 체면이 뭔지,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나 혼자만 어떻게 피할 도리가 없다. 울며 겨자먹기식 지출이 서민들의 한숨이 되고 있는 것이다.
통계청 도시가계연보에 따르면 경조사비를 혼례 및 장례 등의 가정의례를 주관하는 데 드는 관혼상제비와 경조사에 직간접적으로 전달되는 경조비로 나누고 있다. 관혼상제비는 사람의 일생을 통하여 치르게 되는 통과의례인 출생의례(백일, 돌), 혼례(결혼식), 상례(장례식), 제례(제사)에 드는 비용을 의미한다. 경조비는 다시 결혼식, 돌‧백일 잔치, 회갑‧칠순 잔치에 내는 축의금과 장례식에 내는 조의금으로 나눠진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다. 입학, 졸업 축하금, 개업인사, 병문안비 등이 모두 경조사비에 포함된다.
우리 선조들은 이웃의 경조사가 있을 경우 집안 형편을 고려해서 떡, 감주, 막걸리, 옷감, 안주거리 등 경조사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음식이나 생활필수품을 마련해서 주고 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마음이 오갔고, 온 몸으로 자기 일처럼 봉사를 하고, 자기 분수에 맞게 금전적인 도움도 주고 받았다. 이러한 상호부조의 관행은 일종의 품앗이 성격으로 우리의 소중한 전통이었다. 하지만, 도시화 및 산업화 진전에 따라 우리의 경조문화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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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의 형태가 살림에 필요한 가재도구나 예식에 필요한 음식 대신 “돈봉투”로 바뀌었다. 혼상례를 통한 자기과시욕과 남의 이목을 중시하는 체면문화는 우리의 경조사 문화를 일그러지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객이 몰려와야 체면이 서고 화려하고 사치스런 예식을 통해 자신을 과시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 우리네 혼상례 문화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이제 경조사비의 의미는 더 이상 상호부조가 아니다. 높은 사람에 잘 보이기 위해 눈도장을 찍어야 하고, 출세하기 위해서는 경조사를 잘 챙겨야 한다. 소위 잘 나가는 사회지도층의 자녀 결혼식에서 거둬들인 축의금이 억대를 돌파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오늘날의 축의금은 ‘말이 결혼축하요, 상호부조의 전통이지’ 실제로는 결혼의 의미를 상업적 거래로 퇴색시키고 있다. 더욱이 사업상 업무를 이용한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작용하고, 사실상 뇌물의 한 수단으로 축의금이 전달되곤 한다. 너무도 슬픈 우리네 경조사비 지출의 자화상이다.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결혼식 모습은 변한 게 없다. 여전히 허례허식적이고 낭비적인 관행이 만연되어 있으며, 아직도 흥청망청한 구태를 벗겨내지 못하고 있다. 허례 허식적인 예단과 예물, 큰 것, 새 것, 고급스런 것만을 고집하는 살림장만, 무분별한 하객초청, 수많은 인파로 시장판을 연상케 하는 결혼식장, 호화사치 예식, 엄청난 음식물쓰레기를 양산하는 피로연 음식접대, 공과금 또는 뇌물 성격의 축의금 등 어느 것 하나 달라진 게 없다.
결혼 당사자들은 ‘일생에 한 번’을 빌미로 부모가 휘청거릴 만큼 혼수를 얻어낸다. 하객이 몰려와야 체면이 서고, 화려하고 고급스런 예식을 통해 자신을 과시해야 직성이 풀린다. 하객규모, 예식장소, 피로연의 호화 여부가 그 집안의 경제적, 사회적 역량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고, 접수대의 수와 늘어진 사람의 행렬이 곧 그 집안의 지위를 의미한다.
축의금을 늘리려고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면 닥치는 데로 청첩장을 보낸다. 결혼식에 참석하려면 보통 왕복 두세 시간을 거리에서 허비해야 하고, 별로 내키지도 않으면서도 체면 또는 인간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한다. 식장의 분위기 또한 결혼당사자들의 축복과는 거리가 멀다. 애시당초 결혼당사자들을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참석자의 60%는 혼주와 인사하고 축의금만 내고 가거나, 시장판을 연상케하는 피로연 식당에서 식사만 하고 가는 거품 하객이다.
세계화의 급격한 조류는 우리 사회 모두를 급변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경조사비 문화 역시 변화의 예외가 될 수 없다. 원래의 좋은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의 분수에 맞는 지출을 통해 경사스러운 일은 기쁨을 크게 하고, 슬픈 일은 아픔을 나누는 원래의 우리네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조사비 문화는 개선되기는 커녕 오히려 개악되고 있다.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고 있음에도 오직 우리네 혼상례와 관련한 경조사 문화는 변한 게 없다. 여전히 허례허식적이고 낭비적인 관행이 만연되어 있으며, 아직도 흥청망청한 구태를 벗겨내지 못하고 있다.
첫째, 너무도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지만, 그 돈의 대부분이 예식과 관련한 먹고, 마시는 당일의 비용으로 지출된다는 것이다. 원래 경조사비 지출은 상대가 있는 것이고 대부분 보험적인 성격이 강하다. 대개는 시간이 문제이지, 자신이 지출한 만큼 되돌려 받게 되어 있다. 문제는 이렇게 십시일반으로 모여진 돈이 살림밑천으로 귀하게 쓰여지지 않는데 있다. 흡사, 보험을 들어 보험금을 탔지만 당일 날 ‘밥 먹고, 술 마시는’ 비용으로 날려버린 것과 같다.
둘째, 예식을 통한 자기과시욕과 남의 이목을 중시하는 체면문화가 너무도 심각한 상황이다. 하객규모, 예식장소, 피로연의 호화 여부 등으로 집안의 경제적, 사회적 역량을 평가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다. 하객이 몰려와야 체면을 세우니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면 닥치는 데로 청첩장을 보낸다. 화려하고 고급스런 예식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역량을 마음껏 과시하려 한다. 하객들 역시 체면 때문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고, 1인당 5만원 이상하는 호텔 피로연 음식값에 체면상 축의금 5만원을 내 놓을 수가 없다. 자연스레 축의금 액수 또한 올라갈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셋째, 사회지도층 등의 혼상례에 상당한 정부예산이 경조사비 명목으로 합법적으로 지원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정부행정기관, 공공기관, 공기업 등을 막론하고 업무 등 관련있는 사회지도층의 혼상례에 해당 기관장의 이름으로 경조사비를 지출하는 것은 하나의 관행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국민의 혈세가 특정 사회지도층 인사에게 지원되는 문제를 낳게 한다. 일반 서민들 입장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매우 부조리한 일이다. 더욱이 사업상 업무를 이용한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원치 않는, 생전 알지도 못하는 예식에 참석을 강요당하기도 하고, 사실상 뇌물의 한 수단으로 경조사비가 전달되곤 한다.
넷째, 사회지도층의 호화사치 예식의 성행과 그 모방이 문제이다. 사회지도층의 과시적인 호화 혼수 및 사치성 예식 행태 그 자체가 문제될 수는 없다. 돈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식을 위해서 그것도 자기 소득범위에서 돈 좀 쓰겠다는데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것이 문제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일반 국민들의 모방심리를 자극하여 과다 예식비용 지출의 일반화 현상을 초래한다는데 있다. 실용적이고 건전한 예식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 계층간의 위화감을 조성하고, 사회전체의 결속을 저해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상호부조의 본질은 소득재분배에 있는데 우리의 현실은 이것과는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소득이 낮은 계층일수록 경조사비 지출 부담은 크지만 이로 인한 혜택은 오히려 적다는데 있다. 잘사는 사람, 힘있는 사람에게는 경조 금액이 더 커지고, 못사는 사람, 힘없는 사람한데는 더 작아진다. 권력있는 사람들은 접수대가 10개가 넘어서고, 부조금을 내느라 사람의 행렬이 늘어서 있다. 보통사람의 경우도 재분배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다. 우리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회갑, 칠순등 거의 모든 행사에 접수대를 두고 경조 현황을 장부에 기입한다. 그 장부는 상대방의 의례시 경조금액을 정할 때 활용된다. 그 사람의 생활정도와는 관계없이 저 사람이 1만원 냈으면, 1만원을 내고, 10만원을 냈으면 10만원을 내야 한다. 완전 금전교환이 되어버렸다.
그럼, 우리의 경조비 문화 어떻게 바뀌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하객 수를 줄여야 경조사비를 줄일 수 있다. 정말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만 양가 50명 이내에서 참석하여, 하객들의 축복 속에 가족행사로 치러져야 한다. 특히 결혼은 사회적 공적행사가 아니라 개인행사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많은 하객들을 불러 모았다. 하객의 숫자가 곧 그 집안의 수준을 의미하는게 우리의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개인행사에 너무나 많은 사회적 비용이 지불되는 고비용 저효율의 사회적 관행이 되고 있다. 이제 하객수보다는 예식의 진정한 의미가 되새겨지는 우리의 결혼관행을 만들어가야 할 때인 것이다.
다음으로, 호화사치 예식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야 한다. 자기과시 수단, 남의 이목에 맞춘 체면치례용 과소비 예식이 부끄러운 일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호화사치 예식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느끼는 게 현실이다. 무려 98.7%의 국민들이 우리의 예식문화가 바뀌어져야 한다는데 공감하면서도, 71.4%는 정작 자신의 예식에서 그동안 뿌린 돈이 얼만데라는 한 몫 잡아보겠다는 보상심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가치관속에 우리들의 일그러진 혼상례 문화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혼상례 문화의 창출을 통해 예식비용의 거품을 걷어내고 본래의 예식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사회지도층 및 경제력 상류층의 솔선수범이 필수적이다. 사회지도층의 호화사치 혼상례는 일반 국민들의 계층 상향욕구를 자극하여 곧바로 모방되어 확산되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우리 옛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듯이 사회지도층 또는 경제력 상류층이 혼상례 문화 개혁을 선도해야 한다. 영국의 지도층 윤리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제’란 불문율이 있듯이,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국민과 사회를 위해 무언가 큰 희생과 봉사를 각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회지도층 스스로의 건전한 혼상례 실천은 일반 서민의 혼상례문화 수준을 신속하게 건전케 하여 세계화 시대의 생활개혁을 위한 바람직한 전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글/황정선 연구위원(cshwang@kca.go.kr)
한국소비자원 정책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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