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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과 함께 웰빙(well-being)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받는 월급으로 생활비와 자녀 교육비로 쓰기에도 빠듯한 서민들에게는 웰빙바람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아직 내 집 장만을 하지 못한 가정의 경우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번듯한 집한채 장만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꼬박꼬박 주택구입부금을 넣거나 주택구입용 목돈을 마련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혼 후 몇몇 년 만에 집을 구입하였다는 것이 주된 화두가 된다. 이처럼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이 큰 이유는 아마도 사람들이 부모세대나 이웃의 집 없는 설움을 직접 겪거나 보아왔으며, 집 한 채의 재산가치가 서민들의 일생의 생활안정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치솟은 집값을 보면 웬만한 소형 아파트도 억 단위이고 대도시의 괜찮은 곳에 위치한 경우에는 수억 단위이다. 매달 월급에서 수십만 원씩을 때어 주택구입 저축을 해오는 서민들에게는 이런 집들이 이제 쳐다볼 수도 없는 그림속의 떡으로 보인다.
그래도 살다보면 고진감래(苦盡甘來)라. 열심히 저축하고 모은 돈과 은행대출금 (또는 부모님의 도움)으로 집을 사거나, 수익성 있는 곳에 청약한 아파트가 당첨되는 행운이 찾아와 그리던 내 집을 장만하게 된다. 하지만 집장만을 위해 금융기관 등에서 빌린 대출금은 은퇴할 시기가 되어서야 겨우 다 갚을 수 있게 된다. 평생을 집한 채 장만을 위해 살아왔고, 그 집한 채가 평생 모은 재산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선진국인 미국의 경우도 우리의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다. 오히려 출발점은 우리보다 더 불리하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시점부터 부모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하게 되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시점에는 갚아야할 학자금 융자와 같은 빚을 지게 되며, 월급타서 생활비로 쓰면 남는 것이 별로 없으니 단기간에 근사한 집을 장만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최근에 우리나라에도 시행되고 있는 모기지론(mortgage loans)이라는 장기주택저당대출을 이용하기 때문에 집값의 10~20%만 가지고도 비교적 빨리 집을 장만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모기지론도 상환기간과 형태만 다를 뿐 빚이므로 길게는 30년간 매월 일정 금액을 갚아야 한다. 예컨대 30대 초반의 샐러리맨이 그동안 저축한 종자돈(down payment)을 가지고 모기지론을 대출받아 집을 구입한 경우 은퇴하는 60대 초반이 되어서야 마이홈(own house)으로 진 빚을 다 갚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경우와 다른 점은 평생 모은 재산인 집에 대한 의식이다. 우리는 집을 노후의 불안감 때문에 혹은 자식에게 물려줄 상속분으로 무덤에 가는 날까지 갖고 있어야 할 재산으로 보지만 미국인들은 그렇지 않다.
물론 미국의 경우 노인연금을 포함한 사회복지가 상대적으로 잘되어 있어 은퇴 후의 생활에 대해 우리같이 큰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집을 담보로 노후대책을 보장해주는 ‘역모기지(reverse mortgages)라는 제도 덕분이다. 상당부분의 미국인들은 은퇴 후 공적연금으로 최저생활수준을 유지하며, 소유하고 있는 집을 금융기관에 담보로 잡히고 연금식으로 생활비를 융자받는 역모기지를 이용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노후생활을 보낸다.
역모기지는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이미 15년 전에 도입되어 정착된 제도이다.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연방주택국; FHA)와 모기지전문기관인 패니메이(FNMA)가 주체가 되어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지정한 금융기관을 통하여 62세 노인들에게 연금형태의 융자금을 지급해준다. 물론 지급형태, 액수, 기간 등은 상품종류와 계약조건에 따라 다르다.
전형적인 예를 들면, 5억원 담보가치의 집을 가진 62세 노인이 10년 동안 집값의 50% 정도를 매월 일정금액을 받고자 한다면 대략 매달 200여만 원을 받을 수 있으며, 계약기간을 20년으로 늘리면 매월 100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 계약기간이 지나면 지정금융기관(lender)은 집을 처분하고 남은 돈을 계약자에게 돌려주며, 계약자는 언제든지 재계약을 할 수 있다. 만일 계약자가 역모기지에 관련된 종신보험에 든 경우라면 계약기간이 지나더라도 사망 시까지 보험사로부터 월 연금액을 계속 받게 되어, 계약 종료 시 생존에 따른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직 역모기지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앞서 언급한 집 상속에 대한 의식이나 노후의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노인들이 자녀들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고 떳떳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역모기지제도가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65세 이상 노령인구가 8%가 넘는 선진국형 고령화시대로 접어든 시점에서 안정된 노후생활을 보장해주는 바람직한 제도이다. ‘집 한 채와 함께한 일생’이라는 말이 왠지 서글프게 들린다. 하지만, 장유유서(長幼有序), 부모봉양(父母奉養)은 옛말이요 친 자녀에게까지 소외당하며 고통 받는 노인들에 관련된 기사를 흔하게 접하는 오늘날 역모기지제도는 이러한 사회적 병리현상을 치유할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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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종인(jilee@cpb.or.kr) 한국소비자보호원 정책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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