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소비철학

심플하게 사는 즐거움

이영미 <‘마녀체력’ 저자>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재미난 ‘잼 실험’을 했다. 대형 슈퍼마켓 진열대에다 시식용 잼을 올려놨다. 처음엔 6가지 종류의 잼을, 다음엔 24가지 잼을 진열해 놓았다. 당연히 잼의 가짓수가 많을 때 사람이 더 몰려들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24가지일 때 실제로 잼을 구매한 비율이 훨씬 낮았다. 즉 선택의 가짓수가 많아지면, 소비자들은 갈팡질팡 하다가 오히려 결정을 포기하고 아예 제품을 사지 않는다. 혹시 사더라도 선택한 제품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진다.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미련과 후회가 계속 마음 언저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영미 작가의

한 줄 소비철학

선택의 패러독스에 빠져들지 않기

나만의 소비철학을 갖기까지

이런 선택의 패러독스는 비단 제품 구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학교, 전공, 직업, 취미, 연인, 정보, 종교 등등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 자체가 선택의 연속이니까. 이처럼 무한한 선택권의 자유가 주어진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는 과연 과거보다 행복해진 것일까?

운동을 시작하면서 내 삶은 예전보다 명쾌하고 심플해졌다. 어디에다 더 삶의 가치를 두어야 하는지, 우선순위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 운동할 시간도 부족한데, 무언가를 고르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 싫었다. 쓸 데 없는 스트레스와 불만에서 벗어나 소박하지만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아가고 싶었다.

추천 하나. 백화점이나 대형 마켓에 거의 가지 않는다

웬만한 주부라면 지갑에 한 장씩 갖고 있을 백화점 카드가 없다. 큰돈을 쓰는 게 아깝기도 하지만, 상품이 너무 많아서 잘 고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물건을 마구 사들인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봤자 오히려 골치만 아프다. 아무것도 나아지는 게 없으니 말이다. 차라리 두어 시간, 밖에 나가서 실컷 달리고 오면 기분이라도 좋아지지.

비슷한 이유로 대형 슈퍼마켓에도 잘 가지 않는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많이 사다 놓으면 반드시 쓰레기가 된다. 얼른 다녀올 수 있는 동네 마트나 편의점에 들러 조금씩 산다. 쌀이나 몇 가지 부식은 온라인 생협에서 구입하고, 과일은 산지 직거래를 이용한다. 수요일마다 서는 아파트 시장에서 야채나 생선을 고르고, 두부와 야쿠르트는 이왕이면 노천에서 장사하시는 분들 것을 산다. 내가 사는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추천 둘. 같은 브랜드를 선택해 오래 쓴다

크게 만족도가 떨어지지 않는 한 같은 브랜드를 고수한다. 그리고 한번 고른 물건은 유행에 상관없이 상당히 오래 쓰는 편이다. 새 아파트에 입주한 뒤로 현재 15년째 살고 있다. 수영장이 코앞에 있고, 벚꽃나무 산책로가 아름다워서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 새로운 옷을 고르기 위해 헤매는 시간이 아깝다. 취향에 맞는 단골 옷집 한두 군데를 알아두고 가끔 들러서 사는 게 좋다. 비싼 옷이 아니라 자기한테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자신 있게 소화하는 것이 진정한 패션이다. 미용실도 철새처럼 옮겨 다니지 않는다. 나한테 맞는 머리 스타일을 골라 유지하면 더 개성 있어 보인다.

단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첨단 기능이 들어간 컴퓨터나 휴대폰, 태블릿, 애플워치 같은 디지털 기기에는 과감히 투자하는 편이다. 그리고 운동할 때 입는 옷이나 신발 같은 기능성 제품은 비싸더라도 품질이 우수하고 내 몸에 잘 맞는 것을 구입하고 싶다. 그래야 운동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추천 셋. 빨리 판단하고 혼자 결정한다

뭐든 이리저리 재기보다는 빨리 판단하고 결정하는 쪽이다. 결혼 같은 인생의 중차대한 일도 그렇게 결정했는데, 다른 건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뭔가 구입할 때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차피 사고 싶은 제품의 상이 명확해서, 다른 사람과 가더라도 결국은 내가 원하는 것을 고른다. 귀가 얇지 않아서 아무리 점원이 권해도 잘 넘어가지 않는다. 내 눈에 들어야 좋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고 난 뒤에 만족도가 높다. 설사 맘에 안 드는 구석이 있더라도 철저하게 나의 선택이었기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그럴 땐 미련을 두지 않고 빨리 잊어버리거나 포기한다. 텔레비전 광고 같은 현란한 유혹이 내 삶에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다. 책이나 급하게 필요한 것은 온라인 숍을 이용하지만, 홈쇼핑 채널을 보다가 혹해서 물건을 구입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예수나 부처 같은 성인도 아니고, 점쟁이나 점술가도 아닌 내가 매사 좋은 선택만을 할 수는 없다. 그저 그동안 살아온 삶의 태도와 직관을 믿고 고르는 것이다. 또한 내 선택을 받은 것이 좀 모자라거나 불편해도, 쉽게 내치지 않고 그 정도 선에서 만족하는 것이다.

선택의 패러독스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고 거기에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무한히 주어진 선택의 풍요 앞에서 우왕좌왕 하지 말고, 자기만의 절제력을 가져야 한다.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말고, 더 좋은 것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

큰 성공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도,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에 만족한다. 내일 당장 죽는다 해도 별로 아쉬울 게 없다. 그동안 잘못 한 선택이 왜 없겠냐만, ‘그때 이랬다면 좋았을 걸’ 같은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많은 점들이 촘촘히 선으로 이어져서 현재를 만들어 온 것이 아닌가. 어느 한 시점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점을 찍는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딱 하나 있긴 하다. 만약 좀 더 일찍 운동의 세계에 뛰어들었다면,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지녔더라면 어땠을까? 지난 12년간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인생의 변화를 맛보지 않았을까? 어쩌면, 에디터가 아니라 아예 운동선수로 나섰을라나?

이영미 작가는?

출판 에디터로 일하며 100여 권의 책을 만들었다. 책상 앞에 쪼그리고 앉은 13년 차 에디터로 살다 보니 고혈압과 스트레스, 저질 체력만 남았다. 생전 처음 지리산에 갔다가 나약한 정신노동자로 사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 마흔 살부터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몸을 움직인 끝에 올빼미족 게으름뱅이에서 아침형 근육 노동자로 변신했다. 트라이애슬론 경기 15회, 마라톤 풀코스 10회, 미시령을 자전거로 오르내리는 강철 체력이 되었다. 현재 출판 에이전트로 일하고, ‘인생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강의를 하고, 라디오와 팟캐스트에서 책 소개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