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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없이, 스마트폰 없이 다정한 아날로그 육아

이연진 <‘내향육아’ 저자>

“과학을 어떻게 가르쳤어?” 친구들로부터 종종 받는 질문이다. 집에 실험실이 있는지, 아이가 코딩이나 로봇 학원에 다니는지. 오랜 친구들은 느리고 감성적인 내가 TV 프로그램 <영재발굴단>에 나오는 과학 소년의 엄마 되었음을 신기해한다.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과알못’ 엄마이기에 과학을 주도면밀히 가르치지는 못한다. 공학도 아빠와 꼬마 과학자가 함께 하지만 우리 일상은 첨단과는 거리가 멀다. 육아뿐 아니라 생활 전반이 그러하다. 느리고 담담한 아날로그 식이다.

영재발굴단의 과학 소년, 학원 대신 부엌

우리 집에는 실험실이 없다. 코딩이나 로봇은 커녕, TV도, 빔 프로젝터도 그 흔한 세이펜도 없다. 아직까지는 영상보다 종이가, 전자음보다 육성이 편하다. 아이는 학원 아닌 부엌에서 실험을 한다. 선풍기나 토스터 등 생활 가전을 관찰하며 기계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책과 카탈로그에서 정보를 찾고, 궁금한 것은 찾아가 체험한다. 텃밭에 물을 주고 열매를 딴다. 동그란 일상 안에서 크고 작은 몰입과 확장의 즐거움을 알아간다.

아이와 나는 많은 시간을 부엌에서 보낸다.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부엌에 들어와 저울과 계량컵으로 재료의 용량을 재고, 시계의 초침을 보며 조리 시간을 확인했다. 콩 꼬투리를 벗기고 쌀을 씻어 압력솥에 밥을 안친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뽑은 면과 마당에서 딴 토마토로 파스타를 만든다. 캡슐, 필터, 모카 포트 등을 이용해 커피도 내려준다. 과즙이 묻은 행주의 얼룩을 과탄산소다로 뺄 때면 산과 염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팝콘을 만들며 수증기의 팽창을 관찰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열의 전도와 대류, 액화와 기화, 효모의 작용, 끓는 점과 어는 점 등 많은 개념을 체험했다.

부엌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어디 과학뿐일까. 식재료의 출처와 어떤 마크를 달고 있는지를 살피며 먹거리의 안전성을 따져보는 습관도 생겼다. 쌀이 저절로 밥이 되는 것이 아니며, 배추가 김치가 되기 위해서는 적당한 온도와 시간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이런저런 요리를 해보며 창의력을 키우고, 파스타 한 접시로도 가 본 적 없는 이탈리아를 상상한다. 여러 재료를 다루고 설거지를 하며 소 근육, 중 근육, 대 근육은 물론 마음 근육까지 키워나갔다. 좋아하는 일에 가장 착실히 반응하는 건 역시 마음이니까.

느리지만 추억이 깃드는 아날로그 육아

디지털은 빠르고 완벽하지만 어지간해선 추억이 되지 못한다. 반면 아날로그는 느리고 불완전하지만 감각과 스토리가 나란히 깃들기에 즐겁다. 아이도 그 즐거움을 알게 하려면 부모가 시동을 걸어 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느리고 번거로운 것일수록 아빠, 엄마와 재미있고 따뜻하게 경험해 보면 좋겠다. 천천히 함께하는 즐거움을 이때 아니면 언제 누려볼 수 있을까.

각별한 추억으로 남을 요리

아이를 부엌에 들이면 일이 커진다. 혼자서는 5분 만에 끝낼 설거지도 아이와 함께하면 1시간이 걸린다. 바닥은 흥건해지고, 옷은 엉망이 된다. 뜻하지 않게 인내심의 한계를 갱신하지만,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요리는 자립의 기초다. 이제 아이는 물 한 방울 안 튀고 능숙하게 설거지를 하며, 나보다 더 맛있게 밥을 짓는다. 끼니 때 마다 훈김이 오르고 작은 소란이 인다. 버튼을 눌러 주문하고 바로 음식을 받는 패스트푸드와 집밥은 그렇게 다르다. 집밥이 각별한 추억으로 남는 건 이 때문일 테다.

편지와 노트로 나누는 대화

말로 전달이 어렵거나 꼭 하고 싶은 말은 편지로 적는다. 아이가 한창 글자를 배우던 네댓살엔 아침마다 짤막한 편지를 써주었고, 주머니나 가방에 깜짝 쪽지를 넣어두기도 했다. 심심하면 아이와 노트를 펼치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써 넘긴다. 연필로 그린 단순한 이모지에도 아이는 와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일곱 줄 써주고 ‘나도 사랑해’라는 다섯 글자 돌려받지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일회용보다 엄마표, 랜덤곡보다 CD

아이의 준비물은 지퍼백 대신 간단히 만든 천 주머니에 담아준다. 아이는 이 주머니를 직접 빨아 말린다. 지퍼백과는 대하는 마음부터가 다르다. 구멍 난 바지는 외할머니 몫이다. 아이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정성껏 기워 주시니 세상에 하나뿐인 명품이다. 또, 음악이 듣고 싶을 때면 웹상의 랜덤 곡을 듣는 대신 CD를 고른다. 아이는 CD를 조심히 꺼내어 듣고 싶은 곡의 번호를 누른다. 여러 감각을 동원하는 과정을 거쳐 듣는 음악이기에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애정이 깃든 아날로그시계

아이는 시계를 좋아한다. 아가 적부터 아날로그 시계에 호기심과 애정을 가졌고, 읽고 싶어 했다. 집안 곳곳에 아날로그 시계가 놓인 이유다. 아이는 바늘들을 요리조리 돌리며 즐거워했다. 한참을 바라보다 초침이 한 바퀴 돌아야 분침이 움직이고, 분침이 한 바퀴 돌아야 마침내 시침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몇 해 전, 외할아버지의 손목시계를 탐내는 아이에게 친정 아빠는 멋진 손목시계를 선물해 주셨다. 이 시계가 아이의 사랑을 받는 건 당연한 일. 아이 손목엔 전자시계나 키즈폰이 아닌 아날로그 손목시계가 걸려있다.

자전거가 주는 선물

아이는 자전거로 유치원에 통학했다. 나 역시 아이가 내보낸 입김을 뒤쫓으며 페달을 밟았다. 때론 빠르고 편한 차 생각이 간절해도 아이는 안다. 자전거를 타면 동네 강아지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고 이슬 맺힌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을.

만지고 느끼고 음미할 때 삶은 흐른다

물건을 수리 하고, 텃밭을 꾸리고, 집안일을 함께 하고, 책 읽고 보드게임을 하는 일상. 이 소소한 일과를 통해 내가 아이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건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이다. 디지털 방식이 보편화 되고 세상이 편해질수록 스스로 뭔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는 줄어들게 마련.

나는 아날로그 방식이 아이에게 ‘지도 보는 법’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내비게이션을 보면 더 빠르고 정확하게 길을 찾겠지만, 시간이 걸리고 돌아가더라도 지도를 보며 찾은 길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렇게 길을 익히면 내비게이션이 고장 나도 당황하거나 헤매지 않게 된다.

다소 더디어도 아이가 느끼는 성취감이나 기쁨이 연쇄 반응을 일으켜 좋은 습관을 만들고
더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시키리라 믿는다.
만지고 느끼고 실수하고 음미할 때 삶은 흐른다. ‘아날로그가 정답이다’ 그리 생각하진 않는다.
‘아날로그를 좋아해’ 이건 우리 얘기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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