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소비철학

퇴근 후,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

김유미 <‘물감을 사야 해서, 퇴사는 잠시 미뤘습니다’ 저자>

한번은 신용카드 카드 명세서가 궁금해졌다. 크게 쓰는 것도 없는데, 생각 이상으로 청구되는 비용이 의심스러웠다. 출력까지 해서 살펴본 나의 카드내역은 마치 일기장 같았다. 보통 시작은 편의점이었다. 점심시간에는 카페에 있거나 인터넷 쇼핑을 했다. 퇴근하고는 음식점과 카페를 코스처럼 움직였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몇 만 원도 채 안 되는 카드값이 모여 백만 원을 넘겨 매월 25일이 되면 월급의 절반이 나를 스쳐 갔다. 이럴 거면 제대로 된 코트를 사 입거나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올 것이지.

김유미 작가의

한 줄 소비철학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은 나다움의 발견

나만의 소비철학을 갖기까지

나의 일상도 마찬가지였다. 카드 명세서처럼 재미없는 일로 반복되고 있었다. 지루하고 외로웠다. 회사를 관두고 서울을 떠나면 달라질까 싶어 아주 긴 여행도 계획했었다. 현실적인 여건을 따지다 결국 떠나지도 못했다. 삼각김밥 사듯이 비행기 티켓을 끊지 못하는 내가 슬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나는,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어서 무엇을 배우기 위해 학원을 등록하는 기분은 남달랐다. 일단 부모님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니 비로소 독립한 기분이 들었다. 손을 벌리지 않고 내가 번 돈으로 크게 썼다. 학원비에 이어서 스케치북과 연필, 물감을 샀다. 나의 신용카드는 여전히 한도 초과지만, 명세서에는 새로운 하루가 등장했다. 한번 쓰고 사라지는 지출이 아니었다. 월급으로 물감을 샀고, 물감은 내게 또 다른 시간을 선물했다. 그 시간 안에서 나는 그림을 그리고, 나와 이야기했다.

범상한 사람은 시간에 실려 가지만, 위대한 사람은 시간을 창조한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기 전의 나는 누군가 만들어 준 시간에 실려 다녔다. 그렇다고 지금 시간을 창조하며 살아가진 못한다. 그저 일과 사람에 실려 보내던 시간 속에서 내 시간을 발견한 것이다. 그 시간을 좋아하는 일로 가득 채워 나가고 있다. 나를 위해 시간을 쓰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지 발견했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지 않더라도, 매일 퇴근 하고 조금씩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행복으로 충분하다.

추천 하나. 퇴근 후 시간은 생각보다 많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눈치 보며 했던 야근과 회식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 업무를 마치고 6시 1분에 나왔다. 대신 저녁 6시까지는 업무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했다. 그래야 ‘칼퇴’의 순간에 당당할 수가 있다. 그 후 퇴근하고 나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시 퇴근을 한다면 잠들기까지 6시간 정도가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2시간 정도 비는 시간이 있었다. 곧장 퇴근하는 날에는 화실에서 3시간 정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야근이나 약속이 있어 화실을 가지 못하는 날에는 다른 휴식을 찾았다. 소파에 기대어 SNS 속 그림을 구경하고 좋아하는 책을 집어 들었다.

나는 이렇게 하루 1시간, 적으면 30분이라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좋아하는 일을 생각하려고 했다. 영국 철학자이자 작가‘알랭 드 보통’은 자기 자신과 데이트 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권한다. 가만히 보면 나는, 출근해서는 직장 상사와 동료의 기분이 어떤지 살폈고 퇴근하고는 약속한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지 먼저 물어봤다.

정작 자신에게 그러지 못했음을 깨닫고, 내게도 그날의 기분을 확인했다. 오늘 퇴근하고 친구를 만나고 싶은지,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주로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고 했다. 술자리보다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마음의 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 30분이면 충분하기에, 아무리 바빠도 나와 보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추천 둘. 일주일에 하루, 아무 일정도 없는 날

나의 일정은 단조롭고, 반복된다. 일주일에 이삼일은 화실 가는 날로 정해뒀다. 그리고 하루 정도는 일정이 없는 날로 고정했다. 그 외 시간에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또 다른 휴식을 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약속이나 모임이 우선이었고, 남는 시간에 볼일을 보거나 쉬었다. 그랬더니 일주일 내내 가득 찬 일정으로 방전이 되기도 했다.

산책, 40.9x31.8(cm), oil on canvas, 2018

일요일, 40.9x31.8(cm), oil on canvas, 2019

업무와 개인 일정으로 가득 차 있는 일정표에서 저녁 시간이나 하루가 텅텅 비어 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졌다. 일정이 없는 날이 있기에, 퇴근하고 만나는 친구와의 시간이 기대되었다. 다음 날 화실을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며칠만 지나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니 하루하루가 설레였다. 일정이 없는 하루는 일주일 동안 수고한 나를 위한 작은 보상이다.

추천 셋. 꿈을 퇴사 후로 미루지 말기

처음부터 그림이 꿈은 아니었다. 그저 심심해서 시작한 그림 생활이 취미를 넘어 꿈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화가라는 꿈 앞으로 크게 한 걸음 다가섰다. 여전히 직장을 다니고 미술 전공자는 아니지만, 개인전을 하고 미술대전에도 나가고 싶다. 사실 이번 여름 작가공모전에 당선되고 책도 나오고 하니, 드디어 때가 온 것인가 싶었다. 본격적으로 꿈을 펼쳐야 하는데 회사에 발목 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퇴사병이 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퇴사를 권하는 이야기가 많다. 직접적으로 퇴사를 권하지는 않지만, 퇴사하고 창업을 하거나 프리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때면 그러지 못하는 내가 시시한 월급쟁이로 느껴졌다. 하지만 퇴사가 유행이라고, 그것을 덥석 따를 순 없었다. 퇴사병 치료에는 카드 명세서만 한 게 없다. 여전히 내게는 물감 살 돈이 필요했다. 하필 취미로 삼은 것이 그리는 일이라 월급만큼의 돈을 당장 벌 수 없었다. 아직은 회사의 지원이 필요하다. 본업이 있기에 나의 취미생활은 간절했고 지속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인정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퇴사를 하고 나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하겠다는 꿈을 접기로 했다. 퇴사 후로 꿈을 미루지 않고, 퇴근하고 미리 꿈을 챙기기로 한 것이다. 매일 조금씩 그린다면 언젠가 그 꿈에 닿을 것을 안다. 나는 이미 한번 해보지 않았던가. 그림이 처음부터 꿈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계속해서 했더니 화가라는 꿈이 생겼고 이제 새로운 취미로 글을 쓰고 있다. 다시 한 번 퇴근 후 새로운 하루를 살기 시작했다. 오늘도 나는 퇴근하고 그림을 그리러 간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

김유미 작가는?

보통의 10년차 직장인이다. 2014년 여름 어느 날 취미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5년여 동안 크고 작은 스케치북과 캔버스에 드로잉, 채색화 600여 점을 그렸으며 그사이 전시회에도 몇 차례 참여했다. 이런 경험들이 모여 2018년에는 한국전업미술가협회에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여전히 하루 8시간을 직장인으로 살고 있지만, 저녁 7시가 되면 작가로 변신해 두 번째 하루를 시작한다. 마음 속 풍경이 그림이 되는 순간, 그림 속 풍경이 글이 되는 순간들을 사랑한다.